협업하는 말하기-회의실은 경기장이 아니다
잔디가 소개하는 스마트워크 트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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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의 분위기
혼자 있는 시간이 좋고, 주변에 사람이 많아질수록 무언가에 집중하기 어려웠기에, 나는 조직 생활에 도무지 들어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의 팀 프로젝트가 힘겨웠고, 군대는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그 끝에 회사가 있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회사의 일이라는 것이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두 명 이상의 팀 과제로 진행되고, 설령 혼자서 과제를 맡아 진행하더라도 상사의 컨펌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하기에 결국 협력의 핑퐁이 필요했다.
돌이켜보면 그간의 조직 생활에서 오는 어려움은 대부분 서로 주고 받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글을 통해 정제된 내용을 전달할 때에는 간혹 서로 이해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적어도 갈등 상황을 만드는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때로는 내가, 또 때로는 다른 누군가가 내뱉는 한 마디에 회의실 공기가 쪼그라 들었다가, 부풀어 올랐다가 했다. ‘옥신각신’ 이라는 표현이 적당할지 모르겠으나, 많은 순간들이 그랬다. 나와 상대방의 거리는 왜 이토록 좁혀지지 않는 것일까?
ROI가 안나오는 일
서로의 의견이 무시되거나 반박되는 순간들은 대부분 빠른 의사결정이나 방향 전환이 필요할 때였다. 일정이 촉박하니 그 얘기는 필요없고, 이렇게 저렇게 하면 된다는 말들이 나를 내리 누르고는 했다. ‘그건 ROI가 나오지 않는다’ 라는 마법의 문장도 이 때쯤 등장한다.
자리로 돌아와 조용히 생각해본다. 이게 과연 효율적인 방식일까. 이렇게 해서 조금씩 어그러지는 관계가 다음 번의 더 나은 효과를 보장할 수 있을까. 길게 보았을 때, 이런 방식이 결국 더 일을 그르치게 하는 것은 아닐까. ROI가 안나오는 시간들을 견디며, 결국에는 배려하는 말하기가 더 나은 효율성을 보장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언어에는 나름의 온도가 있습니다. 따뜻함과 차가움의 정도가 저마다 다릅니다.”
– 이기주 「언어의 온도」
당장의 효율만을 따지던, 순간에 편리했던 그 말의 온도는 어땠을까?
관계를 위한 말하기
즉각적인 반박이나 말 자르기는 아무리 상대방의 ‘의견’을 겨냥한다 해도, 대부분 그 ‘상대방’ 본체에 날아가 꽂히게 된다. 실제 의도가 다르다 하더라도 타인의 고민을 가벼이 여기는 것처럼 보이는 이런 태도는 항상 경계해야 한다.
혹여나 상대방이 내놓은 결과가 의심스럽다면, 그것이 틀렸다거나 부족하다고 단정하기 전에,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인지 스스로에게 일단 먼저 물어보는 것은 어떨까.
나의 지식이나 가치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부정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지식이라는 것은 수많은 사실과 경험들 중에서 주류로 인정되는 것이지만 시기나 환경에 따라 상대적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그것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때로 무의미할 수 있다. 가치관은 통념과 달리 주관에 따른 것이니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또한 상대방이 나보다 더 많이 고민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곧바로 지적하기 보다는 그저 내가 아는 것을 설명하고, 상대방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비교해 보면 된다.
태도로 말미암은 갈등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반사적으로 돌출되는 생각은 자주 위협적이다. 늘 조심하고 경계할 일이다.
효율을 위한 말하기
코끼리 코를 하고 몇 바퀴를 돌고 나면 이내 어지러워 주저앉아 버린다. 똑바로 걸어보려 아무리 애를 써도 앞으로 나아가기란 쉽지가 않다. 몇 시간째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회의가 그렇다. 논의는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길 잃은 의견들로 여기저기 어지럽기만 하다.
대립각을 세운 탓도 있지만, 가끔은 마라톤 회의 끝에 모두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도 있다. 각자의 말을 하느라 서로 알아듣지 못한 탓이다. 양쪽 모두를 이해하는 중재자나 직군별 언어의 동시통역사가 필요한 순간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보통 나와 다른 일을 하거나, 높은 확률로 남의 회사에 있다.
본격적인 말하기에 앞서, 이해하는 개념과 이를 표현하는 용어가 다른 곳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지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각자 배경이 다르고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이해와 표현에 차이가 생기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개념과 용어를 정리하고 언어를 일치시키는 작업이 선행된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걱정할 것 없다. 의심된다면 물어보자. 네 말이 내 말인지. 내 말이 네 말인지. 서로 같은 언어로 말하기 시작하면, 코끼리 코는 몇 바퀴 덜 돌아도 된다.
발전을 위한 말하기
이건 이래서 안되고, 저건 저래서 안된다. 어떤 말을 해도 모두 막아 보이겠다는 수문장 같은 상대 앞에서 내가 가진 논리의 바닥을 보게 된다. 대화라기 보다는 차라리 경기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나는 공격수가 아니고, 더더욱 상대방도 수비수가 아니다.
대안 없는 비판, 비판을 위한 비판은 누구에게나 쉽다. 그러나 이렇게 쉬웠다면 우리는 애초에 모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라든지, ‘이게 원래 이렇게’ 같은 말들은 머릿속에 진득하게 달라붙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일을 하기 위해 모인 우리는 ‘그래서 이제 어떻게’ 가 더욱 필요하다.
답이 없는 고민일 수도 있고, 더 이상 손 쓸 도리가 없는 문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런 고민없이 그저 고개를 가로 젓기 보다는, 여기서 매듭 지을 수 밖에 없는 이유라도 따져보는 편이 낫다. 상황은 언제든 변하기 마련이고, 문제의 이유가 선명하게 남아있다면, 상황에 적응한 새로운 대안을 찾는 길도 멀리 돌아가지 않을 수 있다.
세 개의 문
매일같이 하는 말이라 주의를 기울이기는 더 어렵다. 나는 과연 오늘 경기를 한 걸까, 아니면 논의를 했던 걸까. 또 얼마나 많은 ‘아무말’을 남겼나.
수피(이슬람 경건주의)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말을 하기 전에 먼저 그 말이 세 개의 문을 통과하게 하라.
첫 번째 문은 “그 말이 사실인가?”
두 번째 문은 “그 말이 필요한가?”
세 번째 문은 “그 말이 따뜻한가?”
인터넷에 여기저기 떠도는 내용이라 출처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기도 하지만 그 울림은 크게 다르지 않다. 회사원으로 살게 된 지, 십 년이 지나서야 이게 무슨 의미인지 조금 알 것도 같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말. 세 번째 문을 통과하는 말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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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Dylan Gillis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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